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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아프간: 아프가니스탄 전쟁여행기 Weekly 353호
원제 : グッバイ・アフガン
저자 : 배연홍 (裵淵弘)
출판사 : 마키노 출판 (牧野出版)
출판년도 : 200801
페이지 : 250쪽
 
일본도서 > 기타
배연홍 (裵淵弘)
일본 동경 출생. 가나가와 대학교 졸업. 재일한국인 2세. 1980년대에 사진기자로서 AFP통신사 동경 지국과 AP통신사 서울 지국에서 근무.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국제 분쟁 취재. 1990년대 후반부터 마이니치(每日)신문사 시사주간지인 <선데이마이니치>에서 취재기자로 근무. 현재 프리랜서로서 주로 국제 문제 관계에 대해 취재 집필 활동 중. 주요저서로는 <김현희의 암흑> <조선 유사!> <북중 국경을 가다> 등이 있다. 최근 기사로는 한국 월간조선 2007년 9월호 <알카에다 탈레반의 본거지 파키스탄 서부 국경을 가다>, 일본 월간 중앙공론 2007년 10월호 <테러 성역화하는 파키스탄 국경> 등이 있다.
 
▣ 목 차
고도 페샤와르
아메리카 문화센터의 정체
개종하라고 협박한 아랍 의용군
포탄 세례 환영식
고난의 도피 행군
지하 감옥의 포로들
아랍의 그림자
국경의 활황
시아파 게릴라
샤히드라는 개죽음
등 전 18개 항목

▣ Short Summary
재일한국인 사진기자가 목격한 이상한 나라 아프가니스탄.
“나는 특별히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여러 차례 취재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드나들 기회가 있었다. 마지막 기회는 이번 인질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인 7월 중순이었고, 그 바로 전의 기회는 9.11테러 직후였다. 그리고 맨 처음 아프가니스탄의 땅을 밟았던 것은 21년 전의 일이다.
21년 전, 나는 말도 통하지 않는 산적 같은 아프간 게릴라들과 함께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되었다. 사람이 버러지처럼 잇달아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이상하게 공포감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아프가니스탄은 전장이기 이전에 숨어 있는 비밀의 땅이었다. 비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현실 감각이 조금씩 마비되어 갔던 기억...”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을 직접 취재한 한 기자의 생생한 보고서다. 사진자료도 풍부하며, 현재 한국어 번역이 완성된 상태다.

-상세 내용-
21년 전, 당시 최대의 격전지였던 쟈와르. 동굴에 콘크리트를 발라 만든 요새가 게릴라들의 본거지였으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소련군의 폭격으로 아프간 게릴라들은 픽픽 쓰러져 갔다. 나는 정신차릴 겨를도 없이 게릴라들을 따라다니며 사선을 헤매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옮겨진 곳은 파키스탄 국경지역에 있는 적신월사 병원. 그 지역은 아프간 게릴라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뜻밖의 사람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프간 정부군의 포로들로서 대부분이 동양인 얼굴을 하고 있는 하자라족이었다. 카메라를 메고 나타난 동양인 사진기자를 보고 그들은 모두 술렁거렸다. 왜 그들이 소련 괴뢰의 정부군으로서 무자헤딘과 싸우고 있는 것인지 그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7개의 파로 나누어져 있던 게릴라는 아프간 전선에서 하나가 되어 싸우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장소와 게릴라의 각 파를 달리하여 여러 차례 잠입 취재를 하였는데 그 와중에 7개의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작은 무리의 게릴라들과 만났다. 바로 하자라족 게릴라 무리였다. 하자라족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노예 취급을 받아온 시아파 소수민족으로, 불교 유적이 있는 바미안이 그들의 고향이다. 그들을 보면 성스러운 전쟁 지하드와 상관없는 부족간 대립이 바로 아프가니스탄 분쟁의 원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개월의 아프가니스탄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자 일본은 버블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나는AP통신 서울 지국에 근무하게 되었다. 6월항쟁 등 일련의 데모 현장을 매일 드나들면서 아프가니스탄은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다.

두번째로 아프가니스탄 땅을 밟은 것은 그 이후 10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방콕을 베이스로 해서 다시 국제분쟁취재를 시작한 나는 당시 무자헤딘 세력을 몰아내고 카불을 막 점령한 탈레반 정권을 취재하기 위해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향했다. 꿈에 그리던 카불은 모조리 폐허가 되어 있었다. 지하드를 외쳐 온 무자헤딘의 영락한 모습 그 자체였다. 그에 이어 몇 개월 후 탈레반이 바미안 대불 파괴를 선언하는 바람에 나는 다시 방콕을 떠났다. 우선 아슬라마바드에서 탈레반 대사관의 비자를 받고 유엔기를 빌려 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는데, 그 유엔기는 이슬라마바드에서 카불, 칸다하르, 헤라트, 그리고 탈레반과 대립하는 북부동맹 지역인 마자리샤리프를 거쳐 다시 카불, 이슬라마바드로 돌아가는 소형 제트기였다. 덕분에 나는 이전에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던 지역을 비롯해,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낮게 비행하며 일주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내린 마자리샤리프에는 바미안까지 가는 교통편이 없다는 것이었다. 산을 넘어서 가기로 했다가 산적들이 출몰하는 바람에 철수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북부동맹의 고물 소련제 헬리콥터를 타고 바미안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탈레반이 점령하기 직전에 고립되어 있던 하자라족은 곧 대학살에 처해질 운명에 놓여 있었으나 1500년이나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던 대불은 눈과 코가 깎여나간 얼굴로 그저 담담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 내게는 큰 변화가 있었다. 우선 사진 찍기를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아프가니스탄 관련 취재를 떠난 것은 9.11 직후에 일본의 시사잡지 기자로서였다. 이번에 내 손에 들려 있던 것은 카메라가 아니라 펜이었다. 카메라의 눈으로 보는 아프간과 펜으로 묘사하는 아프간은 어떻게 다를 것인가. 당시에는 아무도 아프가니스탄 땅에 들어갈 수 없었고, 미국 공격이 임박했다는 위기설에 아프간 난민들이 파키스탄으로 물밀듯이 넘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 달 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고, 탈레반 정권은 붕괴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점점 아프간의 현 사정이 궁금해졌다. 바미안 대불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와 보수 작업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왔고, 일본의 학자들이 바미안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조사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발굴 현장 보고에 대한 취재 의뢰가 들어왔다. 내심 쟈와르에까지 가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까지 꾸며 지난 7월 중순, 다시 한번 나는 아프가니스탄행을 결심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내가 이슬라마바드행 비행기를 타고 가고 있던 그때 아프간 인질 사태가 발생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봉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절묘한 타이밍은 나와 아프가니스탄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신의 말씀인지도 모른다. 이제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갈 수 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졌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인사를 하자. 굿바이 아프간! (그러나 실은 아무도 모른다. 또 아는가? 느닷없이 아프가니스탄의 대불이 나를 부를지?)